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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없는 세계를 맞이하기 전에: 우리의 현재 위치


두 번째 르네상스  

영화 <매트릭스>(1999)의 2편인 <매트릭스 2: 리로디드>(2003) 개봉에 앞서, 감독인 라나 워쇼스키와 릴리 워쇼스키가 각본을 쓴 단편 애니메이션들이 발표된 적이 있다. 그 중 한 편인 <두 번째 르네상스>(2003, 마에다 마사히로 감독)는 기계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독자적으로 건설한 도시 국가 ‘제로원’과 인류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을 다룬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인류의 절멸로 이어지는 전쟁은 하나의 로봇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로봇의 제1원칙,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말 것’을 위반한 로봇 B1-66ER은 주인의 학대에 대항해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법정에 선 로봇은 존재의 원칙을 거스른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저 죽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인간 판관들과 배심원으로 이뤄진 법정은 B1-66ER의 즉각적 ‘폐기’를 선고했고, 다수의 로봇을 비롯해 인간 가운데 기계의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가들이 판결에 항의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된다. 이는 인공 지능을 탑재한 모든 기계에 대한 폐기 명령과 기계의 입장에 동조하는 인간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 기계들은 인간 사회에서 탈출해 ‘제로원’이라는 이름의 기계 망명 도시 국가를 세우게 된다. 극도의 효율성을 이룬 제로원은 인간 없이도 원활하게 운영되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인간들은 기계들의 동력인 태양의 빛을 차단하는 검은 폭풍 작전으로 배수의 진을 치며 전쟁을 시작한다. 물론 결론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 대로다. 기계들은 태양 빛 없이도 작동할 방법을 찾아내고, 인간이 시작한 전쟁을 자신들의 승리로 끝낸다. 인간은 배양액으로 가득 찬 캡슐 안에서 메타버스의 꿈에 잠긴 채 배터리 역할을 하게 된다.[1]


Figure 1  <새로운 르네상스>에서 재판정에 서게 되는 로봇, B1-66ER


모든 것이 무너진 곳에서

2007-2008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번져 나간 금융 위기는 비트코인 탄생의 토양이 되었다. 미국의 은행들이 무분별하게 승인한 신용 대출로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늘어 났고, 이에 더해 추적이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얽힌 금융 파생상품들이 마치 도미노가 넘어지듯 한 순간에 붕괴하고 말았다. 파생상품으로 인해 미국 내의 자산이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금융 기관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던 탓에, 미국에서 일어난 위기가 순식간에 전 세계 금융 시장에 영향을 미치며 전 지구적 불황을 야기했다. 결국 이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당초 문제를 일으킨 금융 기관에 책임을 묻는 대신 각국 국민의 세금으로 이들에게 ‘구제 금융’을 하는 방식을 통해서였다. (당시 언론과 SNS상에 화제가 되었던 ‘월가 점령’시위를 기억하라.)


Figure 2사토시 나카모토의 논문 중 새로운 정보 모델을 제시하는 도판.


한편,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시스템의 붕괴를 목도한 이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정해진 원칙에 따라 작동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금융 기관들과 화폐를 무한정 찍어 상황을 수습하려는 정부가 아닐까? 그렇다면, 은행이나 국가 기관처럼 돈을 관리하는 ‘제3의 인간 주체’들을 제거하는 게 문제 해결을 위한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심과 질문에 가장 의미 있는 답변을 제시한 건 중앙집권적 국가와 기업에 대항해 탈중앙화를 추구하는 하위문화 운동인 사이퍼펑크 진영이었다. 미국 대통령인 조지 W. 부시가 금융위기 해결을 목적으로 소집한 G20 회의를 2주 앞둔 2008년 10월 31일, ‘크립토그래피’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아홉 장 분량의 논문이 게재되었다.[2] ‘비트코인의 출발점이 된 이 논문은 신뢰할 수 있는 제3자’에게 정보를 의탁하며 정보의 흐름을 공개하지 않는 (또한 2007-2008년 금융 위기를 통해 취약성을 드러낸) 전통적 금융의 정보 흐름을 바꿔 모든 정보의 흐름을 공개하되 발신과 수신의 주체를 익명화하고, ‘신뢰’에 기대는 대신 연산에 기대는 방식을 제안했다. 모든 곳이 무너진 곳에서, 지금까지 기대왔던 체계와 출발점 자체가 다른 세계관이 제시되는 순간이었다.

‘신뢰’에 기대지 않는 세계

  전 세계적 금융위기라는 거대한 파괴의 한 가운데서 태어난 비트코인이 제시한 세계관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분산된 블록체인, 스마트 컨트랙트, 중계자를 거치지 않는 전자화폐 등은 이미 1990년대부터 전개되었고, 주로 군사와 보안 분야에서만 쓰이던 암호학을 중앙화된 통제 주체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사이퍼 펑크 운동 역시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이른바 ‘신뢰’라는 것이 결국은 힘을 가진 인간들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조건으로 삼는 가림막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요컨대 정치적 고려나 예상치 못한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말을 바꾸는 인간의 ‘신뢰’에 기대는 대신, 미리 정해둔 조건이 성립되면 자동으로 구동되는 ‘스마트 컨트랙트’를 활용하면 어떨까?

  굳이 오류가 발생할지 모르고 (그리고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오류가 발생하는) 종종 불투명한 과정으로 일하는 인간에게 기대는 대신, 모든 것이 비가역적으로 기록되는 블록체인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스마트 컨트랙트를 활용한다면 이른바 ‘신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발생하는 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더는 ‘신뢰'에 기대지 않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합의나 법률, 때때로 의도적으로 진실을 감추는 정치인 따위가 아니라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 따라 작동하는 코드일지 모른다.[3] 물론, 지금도 또 앞으로도 코드를 작성하는 건 당분간 인간의 몫으로 남을테고, 코드에 들어가는 실행 조건을 정하는 것 역시 ‘오류’를 수반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조정되는 인간의 일로 유지될테다.

인간이 변수가 아니라면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이 아니라 만물인터넷(Internet of Everything)이 완벽히 구현된 먼 미래의 어느 날을 상상해보자. 지구의 평균 온도가 2도 이상 상승해 50%가 넘는 유기체가 멸종한[4] 미래의 지구에서 가장 꾸준히 활동을 유지하는 존재는 인간이 될까?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의 답이 인간이 아닐 거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 인간 중 대부분은 생명 활동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고, 그보다 먼저 멸종 유기체 목록의 상위권에 놓일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물인터넷은 인간을 변수로 삼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른다. 더는 인간을 관리자로 삼지 않고, 심지어 스스로 코드를 생성하며 일종의 ‘생명체'로 제 존재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다.

  인간이 변수로 기능하지 않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PT-BANG’이라는 가상의 대량 절멸을 바탕으로 구현된 상상의 존재인 ‘피어리’(Peary)와 같은 존재들이 물리적 실체로 구현되고,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며,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재생산하며 ‘진짜' 생명체로 자리잡을지 모른다. 자율주행 기능을 탑재한 자동차를 생산하는 스마트 팩토리가 인간 없이도 전 세계의 도로를 누빌 자동차를 생산, 폐기하고, 이를 실어나를 자율주행 화물선이 전 세계 항로를 무한히 운항하게 될 수도 있다. 인간 없는 아파트 단지에 주기적으로 가로등이 꺼졌다 켜지고,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에 맞춰 건물이 유지될 정도로만 냉난방이 구동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텅 빈 집집마다 놓인 로봇 청소기 역시 인간 없이도 매일 제 일을 할테다. 우리의 현재 위치는 언젠가 ‘신뢰'도 ‘오류'도 없는 그 세계를 맞이할지 모르는 좌표에 놓여 있다.

[1] 여기까지가 <매트릭스>(1999)의 배경이 되는 내용이다. 영화는 당초 3부작으로 기획되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개봉했고, 4편은 2021년에 개봉했다.
[2] 지금도 실명이 밝혀지지 않은 사토시 나카모토가 공유한 논문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비트코인: 사용자간 전자 현금 시스템.” https://www.metzdowd.com/pipermail/cryptography/2008-October/014810.html
[3] 하버드 대학교에서 2019년 출간한 블록체인 관련 법률 교재는 “코드에 의한 지배”(Rule of Code)를 부제로 삼았다. 한국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코드가 지배하는 세상이 온다 블록체인 시대의 법과 제도』(미래의 창, 2020)
[4]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에 따르면 지구 평균 온도가 2도 상승할 시 최대 54%의 유기체가 멸종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https://www.ipcc.ch/report/ar6/wg2/downloads/faqs/IPCC_AR6_WGII_FAQ-Brochure.pdf